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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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6월 25일 (일) 13:09 판 (→‎앨범)

Florence Foster Jenkins.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설의 소프라노. 조수미와는 정 반대 의미로. 블랙커피, 고음불가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실력파 개가수들의 원조. 문제는 얘들은 개그였지만 젠킨스 여사는 엄청 진지했다는 거.

변호사이자 많은 부동산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플로렌스는 어렸을 때에는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지역에서는 "포스터 아가씨"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고,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꽤 날렸다. 하지만 유럽으로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아버지가 즐~ 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프랭크 손톤 제임스 박사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서 달아났지만 이 남자가 매독을 옮기는 바람에 고생하고 관계가 결딴났다. 하지만 당시는 이혼법이 없어서 따로 떨어져서만 살다가 이혼법이 생기고 나서 이혼해 버렸다.

이후 피아니스트로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피아니스트 활동을 이렇게 오래 한 분이 성악의 음정은 그렇다고 치고 리듬까지도 파괴한 걸 보면 분명히 음정과 리듬을 해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고도의 기술이었으리라. 그나마도 팔을 다친 여파로 어렵게 되자. 피아노 교사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고 영국 출신 배우 세인트 클레어 베이필드를 만났다. 베이필드는 이후 젠킨스 여사의 평생 동안 함께 살았고, 여사가 성악계에 혜성 같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매니저로 활약했다. 주로 하는 일은 악평이 실린 신문을 못 보게 막는 것. 하지만 둘은 동거만 했지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고, 여사는 평생 동안 첫 남편의 성인 젠킨스를 그대로 썼다.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은 베이필드를 만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딸의 음악 공부를 반대했지만 죽고 나서는 많은 유산을 안겨준 것. 이어서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그 유산까지 돌아오자 나자 굉장한 재력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게 되는데... 성악만은 제발!

결국 1912년에 개인 리사이틀을 열면서 성악계에 데뷔했다. 이미 40이 넘은 나이다. 포지션은 소프라노. 게다가 소프라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이도로 초고음역을 소화하는 콜로랄투라까지 대담하게 소화해 냈다. 소화해 낸 건지 그냥 토해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표적인 예가 모차르트오페라 <마술피리>에 들어 있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하지만 한편으로는 클래식 음악의 후원자로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여사가 만든 푸치니 클럽이 그 대표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가수 중 하나였던 엔리코 카루소도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성악가 욕심만 안 가졌어도 여사께서는 아마도 미국 클래식 음악계의 후원자 정도로 기록되고 잊혔을 것이다.

일단 여사님의 위대하고 충공깽스러운 걸작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듣기 전에, 예습 차원에서 조수미가 부른 버전을 들어 보자. 그래야 여사님의 버전을 들었을 때 밀려오는 감동과 충격이 배가 된다.

다른 유명 소프라노가 부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찾아서 예습해 보면 더욱 좋다. 그리고 이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여사의 위대한 목소리 속으로 빠져 봅시다! 워낙 오래된 녹음이라 여사님의 뛰어난 목소리를 100% 완전한 음질로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감상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런 낡은 레코드스러운 녹음이 어딘가 모르게 잘 어울리기도 한다.

여사는 나름대로 시대의 첨단을 달렸다고 볼 수 있는데, 일단 무대 연출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노래 못하는 걸 연출로 때우는 면에서는 한국이나 일본 아이돌의 원조인 셈이다. 화려한 드레스에 날개까지 뒤에 달고 나타나는가 하면, 무대에 대형 조개껍질 모형을 세워 놓고, 껍질이 열리면 그 안에서 짜잔~ 하고 나타나는 연출을 하는 것이 그 예. 워낙에 화려한 의상과 무대 장치를 동원하다 보니. 이런 무대 연출이 좋아서 공연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티켓 마케팅에도 독특한 재능을 보여서, 젠킨스는 자신의 공연을 보고자 하는 이를 자신의 응접실로 오도록 해서 직접 표를 팔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비평가들은 불행하게도 걸러졌다. 젠킨스 여사가 생전에 제대로 빛을 못 본 데에는 이렇게 비평가들이 그 분의 탁월한 예술을 감상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탁월한 재능과 무대 연출로 날로 명성이 상승한 끝에, 결국 1944년에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서 보고 싶어 한다는 그곳, 카네기홀 무대까지 서고 말았다! 이 분을 잘 모르던 사람들까지도 도대체 누구기에? 하는 생각에 관심이 왕창 올라갔고 결국 표가 홀라당 매진되었다!

여사님의 절정이었던 카네기홀 공연 후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인지 닷새만에 쇼핑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 후 저 세상으로 가셨다. 하긴 그 때 나이가 76살이었으니 젊은 사람들도 엄청난 체력 부담을 안는 단독 콘서트를 치르고 나서 에너지가 바닥까지 빠졌을 터.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지금까지 노래를 잘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이 카네기홀 공연 이후에 쏟아지는 비난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숨진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전까지는 청중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것과는 달리 카네기홀 공연은 일반적인 채널로 티켓이 팔렸고, 공연 다음날 신문들은 온갖 풍자와 조소를 가득 담아 리뷰를 써 대긴 했다. 그러나 그동안도 그랬던 것처럼 베이필드가 여사님이 보고 충격 받을 만한 신문은 싹 걷어내 줬을 것이고 일흔 여섯이나 되는 나이에 자기 공연 리뷰가 어땠을지 열심히 캐고 다녔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젠킨스 여사는 무려 일흔 여섯의 나이에 평생 소원이었던 카네기홀 공연을 마친 후 어쨌거나 행복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16년 이 분의 삶을 영화화 한 <플로렌스>가 공개되었다. 원제는 >Florence Foster Jenking>로 실제 이름과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8월 24일에 개봉. 메릴 스트립이 플로렌스 역을 맡았고 휴 그랜트가 두 번째 남편 겸 매니저인 클레어 베이필드 역을, 댁도 이제 늙었구려. 사이먼 헬버그가 전담 피아니스트인 코스미 맥문 역을 맡았다. 사운드트랙 앨범도 나오긴 했는데 연기력으로는 두말 하면 잔소리인 메릴 스트립이 플로렌스 흉내를 내려고 노력은 했으나 아무래도 여사의 위대한 재능에는 미치지 못해서 감동이 많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그러니까 젠킨스 여사도 나름대로는 흉내낼 수 없는 특출난 재능이었던 것이다.

후대에 가서는 젠킨스 여사의 탁월한 목소리는 첫 남편에게서 감염되었던 매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고 백악관에서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데다가, 부모님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지 피아니스트 혹은 피아노 교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여사님이 음정도 리듬감도 모두 해체해 놓고서 그걸 몰랐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다.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던 매독균이 중추신경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견해다. 게다가 당시에는 매독 치료약으로 나돌고 있었던 게 수은이나 비소 같은 독성 물질이었기 때문에 젠킨스 여사가 이런 물질을 썼다면 더더욱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은이나 비소를 먹고도 76살까지 살았다면 정말로 인간 해독제 수준. 안 그랬다면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나 성악가로 살다 갔을 텐데. 이렇게도 지울 수 없는 큰 발자국을 남기고 가게 해 준 첫 남편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를 일.

앨범

활발한 공연 활동에 비하자면 이 분은 과작으로 남겨 놓은 녹음이 얼마 없다. 어쩌면 음반사에서 삑사리 난 건 줄 알고 녹음 테이프를 폐기했을지도...

The Glory (???) of the Human Voice

1992년 BMG에서 출시했다. 제목을 풀어 보자면 '인간 목소리의 위대함(The Glory of the Human Voice)' 목소리가 위대한 건지 멘탈이 위대한 건지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선스로 발매되었다. 다행히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첫 트랙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에서 그야말로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앨범의 표지를 잘 살펴 보면, 제니 윌리엄스(Jenny Williams)와 토마스 번즈(Thomas Burns)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사실 이 앨범은 두 개의 녹음을 붙여 놓은 것으로, 당시 음반사 BMG는 포스터 여사의 위대한 목소리를 복각해서 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앨범으로 내기에는 양이 적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제니 윌리엄스와 토마스 번즈라는 부부가 찾아와서 음반을 내고 싶다고 배짱 좋게 지른 것. 평소 때라면 문 밖에서 경비가 쫓아냈겠지만 BMG에서는 이들의 노래를 들어 보고 포스터 여사의 걸작에 붙여서 앨범을 내자고 생각했고, 결국 둘을 묶어서 앨범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포스터 여사보다는 훨씬 덜 위대해서 결과적으로는 분량 채우기에 불과하다. 다만 마지막 트랙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화음 만큼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