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쉽게 말해서 위기에 빠진 대상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 긴급하게 지원해 주는 자금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어떤 국가가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서 국제적으로 결제를 해 줘야 할 기축통화가 부족하면 나라가 부도나는 사태, 곧 국가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럴 때 긴급하게 기축통화(물론 거의 미국 달러)를 빌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IMF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정도까지 갔다면 나라가 거의 거덜났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쓰라린 과거가 있다. 그밖에도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거나 할 때에도 채권을 가진 금융기관에서 긴급 자금지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구제금융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영국도 IMF 구제금융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IMF는 40억 파운드를 지원하면서 노동당 내각이 견지해 오던 팽창적인 재정정책을 포기할 것과, 금리 인상으로 인플레를 잡을 것을 요구했다. 이것으로 노동당 집권은 사실상 끝장났고 그 뒤에 정권을 잡은 총리가 바로 그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신자유주의의 기수 마거릿 대처다. 이른바 복지나 노동자의 권리가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생긴다는 '영국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사례로 자주 들먹이게 된다.
IMF가 착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달러화든 유로화든 기축통화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 충분한 외환보유고가 있어서 국제 결제에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 어떤 나라가 기축통화가 없어서 결제를 못하면, 곧 부도가 나면 그 나라도 문제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에도 기축통화의 안정성에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기축통화가 안정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구제금융 제공이 필요하다. 또한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 돈을 빌려준 곳은 슈퍼 갑이 되어 갖가지 간섭을 하게 된다. 엄청나게 강도 높은 구조조정은 기본이고, 온갖 것들을 개방해야 한다. 해외에서 기회는 이때다 하고 돈 들고 쳐들어가서 쓸 만한 기업이나 투자 대상을 먹어치우는 건 기본. 우리나라도 여러 굵직한 기업과 은행이 외국기업에게 인수되었다.
2015년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는 과연 현재의 구제금융 방식이 정말로 위기 탈출을 위한 현명한 방식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도한 복지나 포퓰리즘 타령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리스의 복지 지출은 유럽권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오히려 부자들의 탈세와 부패, 거대한 지하경제 규모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게다가 구제금융 이후 강요되어 온 긴축정책이 그리스 경제를 위축시키고 오히려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든 원흉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구제금융을 주는 쪽은 어쨌든 돈을 받아야 하니 긴축해서 돈 아껴써라, 아껴서 빨려 갚아라, 하고 강요한다. 이런 처방이 오히려 채무국의 경제를 더욱 위축시켜서 구제금융 상환을 더욱 힘들게 하고, 그러면 또 구제금융 달라고 손을 벌리고, 더 긴축하라고 윽박지르는 악순환이 계속 된다는 것. 특히 그리스의 경우에는 구제금융으로 들어간 돈이 그리스의 경제를 살리는 데 쓰이기보다는 민간 부채를 갚는 데 나간 것도 문제다. 그리스에 제공된 구제금융 2,520억 유로 가운데 92%가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민간은행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다 보니 IMF가 나서서 그리스는 원금 일부 탕감이 필요하다고 하는 판이 되었다.
구제금융 대신 채무 상환유예, 즉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말레이시아와 러시아.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투기 자본의 시장 교란 때문에 벌어진 일로 간주하고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다. 한술 더 떠서 내부 경제 보호에 주력해서 외화 유출을 차단하고 해외로 나가 있는 자본 회수에도 힘을 기울였다. 구제금융 받고 시장을 활짝 열라는 식의 IMF식 처방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결과는? 우리나라만큼이나 빨리 외환위기에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부동산 가격이나 물가폭등과 같은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