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기름
보리 또는 밀의 싹을 틔운 다음 말리고 찧은 것. 쉽게 말해서 맥아 혹은 몰트다. 보리가 싹을 틔우고 자라는 과정에서 씨앗에 있는 풍부한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기 위한 디아스타제를 잔뜩 만들어내는데, 싹만 틔운 다음에 더 자라지 못하도록 말린 것이다. 엿의 필수 재료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니까 '엿'이 이름에 들어가 있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기름'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부분은 갸우뚱할 수 있다. 여기서 '기름'은 '기르다'의 명사형이라는 게 가장 정설로 여겨진다. 전라도 쪽에서는 '엿길금' 또는 '엿질금'이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기르다의 전라도 사투리인 '지르다'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서양에서는 맥주를 만들 때 맥아, 즉 엿기름을 널리 써 왔으나, 우리나라는 술을 만들 때 누룩을 주로 썼기 때문에[1] 맥아는 잘 안 썼다. 대신 식혜나 엿을 만드는 기본 재료로 널리 써 왔다. 설탕은 고려시대에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멀리 열대지방에서 온 수입품이니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왕 혹은 고관대작들이나 맛볼 수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생산할 수 있었던 꿀도 벌을 치고 꿀을 따야 하는 과정에 복잡하고 위험성도 있는 데다가 그에 비하면 생산량도 적으니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백성들에게 단맛을 안겨준 건 엿이나 조청이었다. 조청(造淸)이라는 말이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뜻을 가진 지을 조(造)에다가 꿀을 뜻하는 맑을 청(淸)을 붙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조청이 '인조 꿀'이었던 셈.
그러나 보릿고개란 말처럼 보리조차도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던 게 옛날 형편이라 상당한 양의 쌀을 필요로 하는 엿기름이나 엿도 백성들에게는 꽤나 사치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혼자서만 조청을 단지에 담아두고 먹으면서 손자들에게 먹으면 죽는 독약이라고 했던 게 할아버지가 치사빤쓰여서 그런 게 아니다. 대가족 시대에 손자한테 조청 한 입씩만 돌아가도 남아나는 게 있을 리가 없다.
고추장의 주요 재료 가운데 하나다. 찹쌀 또는 보리의 녹말을 엿기름으로 분해시켜서 단맛을 내기 때문. 여기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어서 고추장을 만든다.
식혜와 자주 헷갈리는 식해를 만들 때에도 쌀이나 좁쌀과 함께 엿기름이 쓰인다. 당화효소 때문에 해산물의 조직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고추장을 담을 때에도 찹쌀가루와 엿기름을 사용해서 특유의 단맛을 낸다. 엿기름이 찹쌀의 녹말을 당분으로 바꿔서 은은한 단맛을 만들어 낸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건 겉보리 80%에 밀 20%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수입산 재료인 건 말할 것도 없다. 보리로만 만든 건 좀 비싸고 국내산 보리로 만든 건 당연히 더더욱 비싸다.
당화효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옛날에는 가정에서 소화제로도 널리 쓰였다. 엿기름에 소금을 넣어서 살짝 볶은 다음에[2] 보관하다가 배탈이 났을 때 때 한 숟가락 먹었다. 어욱 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