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라면
결론은 완벽한 면발이었다!
라면의 물이 차다는 게 아니라, 찬물에 라면의 면과 스프를 모두 넣고 끓여서 먹는 조리법.
경희대학교 물리학과의 김상욱 교수가 2021년 2월 2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그야말로 라면계를 뒤집어 놓았다.
물이 끓으면 면 먼저 혹은 스프 먼저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아예 찬물에 면과 스프를 다 때려놓고 끓이는 게 방법이다. 페북 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김상욱 교수가 처음 생각한 건 아니고,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박인규 교수한테 이야기를 듣고 시도해 본 것이다. 김상욱 교수의 라면 끓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찬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물을 끓인다.
- 물이 끓기 시작할 때 계란을 넣는다.
- 30초 후 자른 대파를 넣고 10초 후 불을 끈다.
이렇게 하면 물이 끓은 후 40초 정도면 '완벽한 면발'의 라면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보통 라면 조리법이 물이 끓은 다음 면과 스프를 넣고 4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3분이 넘는 시간이 단축된다.
<알쓸신잡>을 비롯한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데다가 물리학과 교수라는 '전문가' 이미지, 거기에 나름 그럴싸하게 학구적인 유머가 곁들여진 이 페북 포스트는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라면을 끓여 후기를 올렸고, 언론 기사로도 줄줄이 보도되었다. 페북 포스트 첫 줄처럼 '라면의 새 역사를 연' 것까지는 아니지만 정말로 저렇게 끓여도 물이 끓을 때 면과 스프를 넣는 것과 결과가 다르지 않다면 성질 급한 사람들과 귀차니스트들에게는 그야말로 반가운 소식.
그렇다면 물을 끓인 다음에 면과 스프를 넣으라고 했던 라면 회사들은 이런 조리법을 어떻게 볼까? 이에 관한 <한겨레> 기사를 살펴보면[1] 농심 측에서는 '변인 통제' 문제를 거론했다. 물을 끓이면 섭씨 100도 수준에서 온도가 고정된다. 여기에 면과 스프를 넣으면 온도가 약간 더 올라가기는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가스레인지든 전기레인지든 뭐든지 일단 물을 끓였다면 일정한 수준이 유지된다. 따라서 권장 조리시간인 4분 동안 끓이면 화력이 무엇이든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2] 그러나 찬물을 끓이는 과정은 다르다. 찬물을 가열해서 끓을 때까지의 시간은 화력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찬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끓일 때에는 화력이 약하면 끓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면이 찬물에 담겨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즉, 찬물에 면과 스프를 다 넣고 끓이는 방법은 물이 끓은 다음 넣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일정한 맛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찬물'도 온도가 제각각이다. 더운 날과 추운 날에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온도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즉, '찬물'이 몇 도인가도 물이 끓을 때까지의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확한 조리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진다.
여기에 오뚜기는 한술 더 떠서 직접 실험까지 해 보고 기자에게 답을 줬는데, 기존의 조리법대로 할 경우에는 물이 끓을 때까지 4분, 면과 스프를 넣고 4분, 합계 8분이 걸렸는데 김상욱 교수의 방식으로 했을 때에는 4분 20초부터 끓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한 시간이 절약될 것 같은데, 오뚜기 측 주장은 김상욱 교수처럼 물이 끓기 시작한 후 40초만에 불을 끄면 면이 제대로 익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뚜기 측은 면이 제대로 익으려면 조리 시작 후 총 7분 30초가 걸려서 기존 조리법에 비해 30초 정도밖에 시간 단축 효과가 없다고 답변했다. 여기에 더해서 조리 시간이 단축되면 그만큼 물의 증발량이 줄어들어 국물이 싱거워진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라면봉지에 쓰여 있는 물의 양은 라면을 끓이면서 증발하는 물의 양까지 감안한 건데 물이 끓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증발하는 물의 양도 줄어들므로 결과적으로 남는 물의 양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처음에 물을 약간 적게 넣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3]
사실 글의 내용을 보면 진지한 내용은 아니며, 그냥 한번 끓여본 건데 의외로 결과가 좋아서 과학자식 유머를 곁들여서 올린 가벼운 포스팅인데 사태(?)가 이렇게 되다 보니, 다음날 다시 페이스북에 포스트를 올렸다. '라면 한 개를 찬물에 넣어 끓여 먹는 바람에, 방송사와 유튜브 채널에서 연락이 오고 난리도 아니다.'라고 단 하룻만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방송사나 언론사도 그렇겠지만 유튜버도 이런 화제의 인물을 가지고 뭐 하나 찍으면 조회수 왕창 올리는 건 따논 당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제대로 실험 좀 해 달라는 섭외까지 온 모양인데, '나는 그냥 호기심으로 해 본 것일 뿐 각잡고 실험할 생각까지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 사실 이게 물리학의 영역도 아니고, '완벽한 면발' 여부도 과학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주관의 문제다. 농심에서 이야기한 '변인 통제'의 문제 역시 <한겨레> 기사가 나기 전에 이미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도 이 사태(?)가 잦아들지 않자 이번에는 시 한 수를 올리는데...
찬물라면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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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 유머담아 페북에 남겼더니
우라늄 연쇄반응 중수소 융합반응
어즈버 태평페북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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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인류세 코로나 창궐시기 추정)
한편 찬물에 다 넣고 라면을 끓이는 방법을 알려준 모든 일의 원흉 박인규 교수는 2월 6일에 이런 포스트를 올렸다.
그런데 박인규 교수의 2월 2일에 올린 포스트를 보면 '김범준 교수의 주장대로 라면물은 쳐다보면 절대 끓지 않는다. 쳐다보고 있으면, 양자역학적 시간지연 효과가 (상대론적 시간지연 아님) 발생하여 라면 물이 끓지 않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의 근거는 <뉴스웰>이라는 매체에 올린 성균관대 김범준 교수의 "라면 끓는 시간은 왜 더딜까"라는 기고문이다.[4] 그런데 김범준 교수의 기고문에는 양자 어쩌고 하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고 단지 똑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때는 더디게 가고, 어떤 때는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는 뇌의 메커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김범준 교수의 기고문을 본 박인규 교수가 라면 끓기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길고, 그럴 거 없이 그냥 찬물에 면 스프 다 넣고 끓이면 된다는 포스트를 올렸고, 이걸 본 김상욱 교수가 그렇게 라면을 끓여 본 후 포스트를 올린 게 화제가 되어 버린 것.
그러니까 요 포스트가 모든 일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이미 원조는 있었다?
김상욱 교수의 '라면의 새역사를 열다'라는 말은 물론 누가 봐도 과장이 들어간 유머지만, 알고 보면 이미 매스컴에서 몇 차례 이런 식으로 라면 끓이는 방법이 방송을 탄적이 있다.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 2018년 10월 17일 방송을 보면 서울 성내동 만화거리에 있는 한 분식집 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라면을 끓인다. 백종원도 이런 방법은 처음이라는 듯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당시 손님들의 반응은 "면이 너무 꼬들꼬들하다"는 것이었다.
해당 장면을 보면 자막으로 '찬물에 면을 넣으면 익는데 오래 걸리는 만큼 화학반응도 느려져 면이 불고 풍미가 떨어짐'이라는 '호정기 식품연구원'의 코멘트가 있다. 그런데 이 방송이 나간 다음 역시 찬물라면을 끓인 후기를 보면 상당히 호평하는 반응도 많았다. 이 때도 라면 회사에 의견을 물어본 기사가 있었다.[5] 라면 회사 측의 반응은 라면 끓이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며, 라면 봉지에 있는 조리법은 일종의 표준, 즉 이렇게 끓이면 호불호가 가장 덜한 조리법이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자막에 나온 의견과 비슷하게, 면이 물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므로 면이 붇는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결국 찬물라면이 계속 화제가 되자 백종원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백종원의 요리비책에서 3월 31일에 찬물라면을 끓이는 영상을 올렸다. 그것도 처음에는 1개를 끓인 다음, 10개를 한꺼번에 끓이는 실험을 강행했다. 다만 백종원은 일반 가정용 버너보다 훨씬 화력이 강한 업소용 버너를 사용했다. 백종원의 평가는 1개를 끓였을 때에는 면의 겉이 약간 푸석하고 탄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못 느낄 것이라고 평가했고. 10개를 끓였을 때에는 면이 많이 풀어져서 면이 뱃속에 들어가고 20분 쯤 지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아무래도 10개를 끓이려면 5리터가 넘는 물이 필요하고, 업소용 버너를 쓴다고 해도 15분 이상 걸렸기 때문에 면이 끓지는 않지만 뜨거운 물에 오래 잠겨 있다 보니, 마치 뽀글이처럼 되어 버린 것. 또한 국물도 슴슴하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조리법에 나오는 물의 양은 물이 끓으면서 증발하는 양까지 계산한 것이지만 10개를 한꺼번에 끓였을 때에는 이미 물이 끓을 때에는 면이 다 풀어졌기 때문에 증발한 양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정도는 찬물라면으로 끓여도 문제가 없지만 두 개 이상은 무리라고 결론내렸다.
그 전에도 2017년에 방영된 <신서유기3>에서 강호동이 찬물라면을 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강호동식 찬물라면은 찬물에 면만 넣고 끓인 다음 스프는 물이 끓을 때 넣는다. 유튜브나 블로그에도 예전부터 찬물에 면과 스프를 다 넣고 라면을 끓이는 방법을 보여주는 글이나 영상이 있었다. 아래 유튜브 영상도 2019년에 올라온 것이다.
아예 찬물라면이 표준 조리법인 라면
뉴드림코리아(NDK)라는 회사에서 2019년에 출시했던 더엄마라면(The엄마라면)은 아예 찬물에 면과 스프를 모두 넣고 끓이는 게 표준 조리법이다. 제조는 오뚜기라면 OEM인데, 오뚜기라면은 다른 라면 회사와는 조금 다르게 건더기 스프는 찬물에 넣고 끓이도록 명시하고 있다. 더엄마라면은 일반 매장에는 보이지 않으며 온라인으로만 판매했는데 그나마도 2022년 들어 판매를 중단했다. 가끔 오픈마켓에 물건이 있긴 한데, 2022년 7월 기준으로 유통기한이 4월로 이미 기한이 지난 라면을 팔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주의할 점
냄비의 크기가 중요한데, 냄비가 작으면 면이 다 들어가지 않는다. 쪼개서 넣거나 해야 하는데, 끓는 물에 면을 넣으면 일단 물에 들어간 다음에 풀어지기 시작하므로 젓가락으로 휘젓거나 해서 면이 모두 물에 들어가게 할 수 있지만 찬물에서는 안 된다. 따라서 냄비 크기가 큰 게 좋지만 또 너무 크면 물의 높이가 낮기 때문에 면의 윗부분이 물에 잠기지 않으므로 잠긴 부분과 잠기지 않은 부분의 익는 정도 차이가 커진다. 찬물라면의 가장 약점이 이 문제로, 일단 면을 찬물에 넣으면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고 위에 뜨기 때문에 물에 잠기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돌로 눌러주자 따라서 물이 끓기 시작할 때 젓가락으로 면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물에 스프를 먼저 풀고 면을 넣는 것이 좋다.
각주
- ↑ "찬물이냐 끓는물이냐…물리학자와 라면회사 ‘면발 논쟁’, 한겨레, 2021년 2월 12일.
- ↑ 라면을 여러 개 넣고 끓이거나, 화력이 약해서 면과 스프가 들어갔을 때 끓는점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라거나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소수의 예외에 불과할 것이다.
- ↑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4분을 꼭꼭 채워서 끓이지 않으므로 물이 끓은 다음에 면과 스프를 넣어도 좀 싱거울 수 있다.
- ↑ "라면 끓는 시간은 왜 더딜까", 뉴스웰, 2021년 1월 28일.
- ↑ "“찬물에 라면 넣고 3분만 끓여도 맛있을까?” 라면 회사에 물었다", 위키트리, 2018년 10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