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와인
Vin de Rhone.
프랑스 남동부의 론 지방, 특히 론 밸리 일대에서 나오는 와인을 뜻한다. 쉬라, 그르나슈, 무르베드르, 상소가 주요하게 쓰이는 포도 품종이지만 그밖에도 소량 섞는 품종들도 여러 가지 있다. 크게 북부와 남부 론으로 나뉘며 북부 론 쪽은 쉬라만 100% 쓰거나 백포도 품종인 비오니에를 조금 넣는 정도지만,[1] 남부 론 쪽은 쉬라의 비율이 가장 높긴 해도 다른 두 가지 품종을 상당한 비율로 섞어 쓰며 많게는 10가지 이상 품종을 쓰는 와인들도 많다. 코트-뒤-론에 블렌딩할 수 있는 포도 품종은 19가지가 된다.
프랑스 와인 중에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으로 손꼽히는데, 14세기에 로마 교황이 약 70년 간 론 지역의 아비뇽에 머물렀던 아비뇽 유수가 그 계기. 그 이전까지는 프랑스 와인은 별볼일 없었고 이탈리아 와인이 가장 잘 나갔다. 가톨릭 미사에 포도주를 쓰기 때문에 가톨릭의 본진인 로마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 쪽은 와인이 일찌감치 발달했다. 론 지역에서도 포도 농사를 지은 건 대략 기원전 600년 경으로 보고 있지만 별볼일은 없어서 별로 역사로 쳐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교황이 아비뇽으로 가는 바람에 교황을 따라온 로마인들이 이쪽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질 좋은 와인을 만들었다. 론 지방은 일조량이나 토질 같은 자연 조건이 포도 농사에 딱 좋았기 때문에 그 주변 지역인 론의 와인이 빠르게 생산이 늘고 급 테크트리를 탔다. 남부 론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샤토뇌브-뒤-파프(Châteauneuf-du-pape)는 교황(pape)의 새로운(neuf) 성(Château)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로도 프랑스 전역에서 와인 양조가 발달하면서 지금은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밀어내고 유럽 와인의 본좌를 차지하게 이르렀다. 론 와인이 비록 보르도나 부르고뉴에 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둘과는 또 구별되는 자신만의 단단한 캐릭터와 품질을 과시하면서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프랑스 레드 와인의 빅 3을 꼽으라면 당연히 보르도, 부르고뉴, 론. 가성비로 보면 셋 중에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2만 원대에 파워 있고 근사한 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론이다.
론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맵다'(spicy). 마치 와인에 후추를 잔뜩 친 것처럼 자극적이다. 쉬라만 사용하거나 쉬라 80~90%에 많아야 한두 가지 정도 다른 품종을 블렌딩하는 사용한 북부 론 와인들은 더더욱 향신료 향이 진하게 나타나며, 여러 품종을 블렌딩하는 남부 론 쪽은 향신료 향도 강하지만 좀 더 화려하고 쿨한 느낌이 있다. 무게감으로 본다면 보르도보다는 약간 가벼운 감도 있지만 고급 론으로 넘어가면 계속 깡술만 마시다가는 도대체 뭘 마시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혀가 얼얼해진다. 남부 론의 대표선수 격인 샤토네-뒤-파프는 마시다가 속이 쓰릴 정도로 심한 놈도 있다.
자기 캐릭터도 분명하고, 보존성도 좋아서 잘 상하지 않고 숙성도 오래 가는 편이다. AOC로 가장 대중적인 라인은 코트-뒤-론. 남론과 북론을 아울러 전체 론 지역을 대상으로 한 AOC인데, 대체로 남론 쪽에서 많이 생산한다. 유명 AOC에 비하면야 저렴하지만 무난하면서도 론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런 스타일의 와인이 싫지 않다면 처음 보는 거라고 하더라도 실패 없이 고를 수 있는 편이다. 중간급으로는 북쪽에는 크로-제르미타쥬, 에르미타쥬, 생-조셉과 같은 AOC들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남쪽으로는 바케라, 지공다스, 타벨과 같은 AOC가 지명도가 높은 편. 고급 라인으로 가면 남부를 대표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샤토뇌브-뒤-파프지만 이를 뛰어넘는 초고가 라인업들은 주로 북부의 코트-로티에 즐비하다.
이 지역의 본좌로 통하는 와인 메이커라면 역시 E. 기갈(E. Guigal) 론 지역의 가장 비싼 와인은 여기서 다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같은 지역 AOC라도 E. 기갈 딱지가 붙은 게 확실히 비싸다. 특히 프리미엄 라인인 레 트레조르(Les Trésors)에 속하는 와인들, 그 중에서도 코트-로티 AOC에 속하는 와인은 단연 으뜸이다. 그밖에 M. 샤푸티에(M. Chapoutier)도 론 지역의 유명 메이커. 특히 이 회사는 모든 와인 라벨에 점자를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부터 점자를 넣기 시작했는데 모리스 모니에 드 라 시제란느(Maurice Monier de la Sizeranne)를 기리는 뜻에서라고 한다. 이 분은 점자를 약어 형태로 개량했고 프랑스 시각장애인 단체인 발렌틴-아우이[2]협회를 창립해서 프랑스 시각장애인 권익을 향상시킨 인물이다. 게다가 에르미타쥬에 있는 샤푸티에 포도밭의 이전 소유주이기도 했다. 남부 론을 대표하는 AOC인 샤토뇌브-뒤-파프는 단연 샤토 드 보카스텔(Château de Beaucastel)이 본좌 대접을 받는다.
화이트 와인은 레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비오니에를 중심으로 여러 좋은 와인들이 나와 있다. 독특한 점은 비오니에는 화이트 와인에도 쓰이는 백포도 품종이지만 레드 와인을 만들 때에도 쓰인다. 크로-에르미타쥬나 코트 로티 AOC는 제한된 비율로 비오니에를 허용한다.
이 지역의 로제 와인은 그야말로 프랑스 와인의 본좌 대접을 받는다. 타벨은 로제 와인으로만 AOC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지역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로제 와인 중 하나다. 루이 15세, 오노레 드 발자크,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타벨 로제 와인의 팬이다. 로제 와인은 숙성 그딴 거 없이 마시는 와인이라고 하지만 타벨만큼은 예외로 쳐서 몇 년 숙성하면 더 좋아진다. 물론 장기 보존은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