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
Hops. 영어에서는 복수로 쓰는 게 기본이다. 외국어 표준표기법으로는 '호프'가 아니라 '홉'이 맞다.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내는 주인공. 맥주에 사용하는 것은 밝은 녹색으로 솔방울 비스무리하게 생겼다. 그 모양 때문에 열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확히는 꽃이다. 실제로 말린 홉을 만져보면 얇은 꽃잎이 겹겹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조에 사용할 때에는 운송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분쇄와 건조 과정을 거친 펠릿 형태로 만든 것을 쓴다.
맥주 자체가 나온 것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맥주에 홉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의 일로, 11세기 말에 가서야 양조에 쓴 기록이 나온다. 그 전까지는 맥주에 향미를 주는 방법으로 그루트(gruit)라는 허브 혼합물을 썼는데 홉이 맥주와 만나면서 그루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느렸는데, 13세기가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그루트의 지위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필수요소로 등극한 것은 16세기 이후 쯤이다.
홉은 맥주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구실을 한다. 향미 말고도 보존성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한다. 홉을 맥주에 넣으면서부터 낮은 알코올 도수에도 불구하고 맥주의 보관 기간이 크게 늘어났고 마시고 꽐라 될 수 있는 음료로서 와인과 맞장 뜰 수 있게 되었다. 먼 곳에 수출하는 맥주는 홉을 왕창 때려넣어서 보존성을 높였는데 그게 아예 스타일로 굳어진 대표 사례가 인디아 페일 에일(IPA). 영국에서 만든 에일을 적도를 두 번 건너서 인도까지 보내야 하니 방부제 삼아 홉을 대량으로 때려넣은 게 IPA는 스타일로 굳어졌다. 맥주 하면 가장 먼저 독일을 떠올리고, 실제로 홉의 역사를 만든 곳도 독일의 할러타우지만 체코의 홉도 뒤지지 않는다. 체코산 홉, 그 중에서도 자츠 지역 홉은 세계 최고 중 하나로 인정 받으면서 유럽의 네 가지 노블 홉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체코의 라거 맥주 필스너가 괜히 잘나가는 게 아니다. 사실 독일의 맥주도 상당수는 필스너 스타일이다. 일본의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가 체코 자츠 지역의 홉을 썼다는 것.
우리나라의 말오줌 맥주는 주로 미국산 캐스케이드 홉을 쓴다. 호주 타즈매니아 섬에서 나는 홉도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끔 하이트 맥스가 타즈매니아 홉 한정판을 내놓는다. 요즘은 오비골든라거와 클라우드 같은 국산 맥주 들이 독일 할러타우산 홉을 썼다고 광고한다. 이 동네는 처음으로 홉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원조급 지역이기도 하고, 독일 필스너용 노블 홉을 공급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홉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2017년 기준으로 미국이며, 그 다음을 의외의 나라인 에티오피아가 잇고 있다. 전통의 맥주 강호 독일은 3위, 중국이 4위이고, 품질로는 최고로 손꼽히는 체코가 5위다. 놀랍게도 북한이 9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2017년에 2천 톤 가까이를 생산했다![1] 북한 맥주에 북한산 홉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핵개발에 따른 각종 무역 제재로 수입한 홉을 사다 쓰기도 난망한 처지니. 한국은 약 3톤으로 32위에 머물러 있다.
성분
알파산
쌉싸름한 맛을 내는 성분은 알파산(alpha acid)라는 것으로 홉의 성분 중 맥주의 맛과 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 물에 녹은 상태에서 열을 가하면 이성질화되어 이소알파산으로 변하고 이게 쓴맛을 낸다. 따라서 맥주를 양조하는 과정에서 워트를 끓일 때 홉을 넣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홉을 넣어서 맥주의 향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호핑이라고 한다. 물론 홉이 쓴맛만을 내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향미를 내는 오일 성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홉의 품종과 재배 지역에 따라서, 또한 여러 가지 홉을 어떤 식으로 섞어 쓰느냐에 따라서 맥주의 스타일을 정말로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미국에서 크래프트 비어가 꽃핀 것도 미국에서 품종개량을 거친 여러 가지 개성 있고 뛰어난 홉이 등장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맥주의 보존성을 높이는 데에도 알파산이 한몫했다. 이소알파산이 그람양성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 다만 이소알파산은 그람음성균에는 별 효과가 없기 때문에 양조 과정에서 잡균이 끼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그러니까 홉이 모든 미생물의 증식을 막아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람양성균 억제 효과는 있기 때문에 보존성이 도움이 된 것. 진짜로 보존성을 확 올려준 것은 파스퇴르가 저온 살균법을 개발하면서였다.
베타산
알파산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진다. 이게 맥주의 품질에 플러스냐 마이너스냐를 가지고도 이런 저런 말이 많다.
에센셜 오일
홉이 단순하게 쓴맛만을 내는 것이 아닌, 다양한 향과 맛을 내는 중요한 성분인 이유로 이 에센셜 오일을 빼놓을 수 없다. 에센셜 오일을 구성하는 성분이나 비율은 품종마다 다르고 품종이 같아도 재배하는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홉을 조합하면 더욱 복잡 미묘한 향과 맛을 낼 수 있다. 대부분 휘발성이기 때문에 워트에 넣고 너무 오래 끓이면 날아가버리므로, 에센셜 오일을 위주로 하는 아로마 홉은 나중에 넣어야 한다.
플라보노이드
플라보노이드 중에는 이소잔토휴몰(Isoxanthohumol)이라는 게 주 성분을 이루고 있다. 최근 동물실험에서 LDL 콜레스테롤과 인슐린 수치가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나 대사증후군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2] 하지만 알코올 자체가 대사증후군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사증후군에 좋다고 홉이 들어 있는 맥주를 마시는 것은 절대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종류
- 노블 홉 : 유럽을 대표하는 네 가지 홉을 뜻한다. 쓴맛이 적은 대신 향이 강한 것이 특징으로, 자츠(Saaz), 테트낭(Tettnanger), 스팔트(Spalt), 할러타우 미텔프뤼(Hallertauer Mittelfrüh) 이렇게 네 가지만을 노블 홉이라고 한다. 자츠만 체코고 나머지는 독일 지역 품종. 필스너를 비롯해서 체코와 독일의 라거가 가진 특유의 향미를 내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유럽의 오랜 전통과 엮여서 뭔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네 가지 가문 같은 느낌이지만 알고 보면 1980년대에 형성된 개념이고, 지리적 표시제 적용을 받는 개념도 아니다.
- 캐스케이드 홉 : 미국 농무부의 프로젝트에 따라서 오리건주립대학교에서 품종 개량을 통해 197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홉이다. 미국에서 만든 홉 답게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많이 쓰는 홉이며, 호주의 타즈매니아,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아메리칸 라거의 변형판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 맥주 회사에서도 많이 수입해다 쓴다. 하이트에서는 가끔 여름 한정판으로 타즈매니아산 홉을 사용한 맥주를 내놓기도 한다.
- 소라치 에이스 :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재배하는 홉. 서구권의 홉 공급이 수요에 비해 부족해지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사용이 늘고 있고 미국 브루클린브루어리의 '소라치에이스'와 같이 서구권으로 역수출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각주
- ↑ "Hops, production quantity (tons) - for all countries", factfish.com.
- ↑ "홉 플라보노이드 성분, 대사증후군 치료에 효과", <후생신문>, 2018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