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즙
肉汁.
고기에 포함된 풍미 또는 영양소를 포함한 수분.
사람의 몸은 70%가 수분이라는 말은 과학상식으로 지겹게 들었을 텐데,[1] 소나 돼지, 닭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는 않다. 따라서 고기의 성분도 대부분은 수분이며, 고기를 가열하면 단백질이 수축 경화되면서 수분이 빠져 나온다. 채소를 구웠을 때 수분이 많이 빠져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열한 고기에서 기름과 함께 발그스름한 액체가 배어나오는데 이걸 보고 피가 배어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게 바로 육즙이다. 현대의 도축 방법은 최대한 피를 제거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고기에는 피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기에서 배어나오는 액체가 정말 피였다면 피비린내가 장난 아니게 났을 것이다. 근육 조직에는 미오글로빈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피를 빨간색으로 보이게 하는 헤모글로빈처럼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철 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날고기가 빨갛게 보이는 것도 주로 미오글로빈 때문. 고기를 익혀도 과하게 익하지 않으면 미오글로빈이 남아 발그레하게 보이는데, 돼지고기를 바짝 익혀서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덜 익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2] 고기로 국물을 내거나 삶거나 할 때에는 핏물을 뺀다고 찬물에 고기를 담그는데, 이게 과하면 육즙이 많이 빠져나와서 맛이 없어진다.
요리사들 사이에서는 육즙에 대한 강박관념이 많다. 고기 요리에 관련된 오래된 화두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육즙을 가둘 수 있는가"다. 고기를 익히는 과정에서 육즙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고기의 감칠맛을 가지고 있는 액체다 보니, 요리사로서는 이게 아까울 수밖에 없다. 고기를 구울 때 강한 불에 구워야 한다든가, 여러 번 뒤집지 말라든가 하는 것들이 대체로 육즙을 가두기 위한 방법으로 거론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육즙을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떻게 조리해도 시간이 지나면 육즙은 흘러나온다. 고기를 굽는다는 것 자체가 단백질 경화를 일으키는 과정이므로 육즙이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육즙을 가두는 방법'이라고 거론되는 조리법도 상당수는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를 낸다. 실제로 실험을 해 보면 강한 불에 구웠을 때 육즙이 오히려 더 많이 나온다. 소고기를 49℃로 익히면 수분 2%를 잃지만 54.4℃에서는 4%, 60℃에서는 6%, 65.5℃에서는 12%로 점점 수분 손실이 많아지고, 71℃까지 익히면 수분을 18%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3] 즉 60도를 넘기지 않는 것, 그러니까 수비드와 같은 방식이 육즙 보존에는 오히려 낫다는 얘기다.
고기를 강력한 불에 단시간 노출시켜서 겉을 바삭한 크러스트를 만들다시피 하는 시어링 역시 육즙을 가두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표면의 조직이 굳어서 방어막을 치기 때문에 안에 있는 육즙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방어막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험 결과 시어링을 하든 안 하든 육즙이 빠져나오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다.[4] 시어링의 효과는 마이야르 반응이 주가 되는 불맛을 내는 거지, 육즙을 가두는 효과는 없다. 여러 번 뒤집지 않고 한 번만 뒤집어서 굽는다고 해도 육즙을 가두는 효과는 없다.
다만 고기를 구운 다음 자르지 않고 잠시 가만히 놔 두는 레스팅(resting)은 육즙이 덜 나오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막 구운 고기는 육즙이 가운데 쪽에 모여 있어서 이 때 자르면 육즙이 많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데 고기 안에 있는 열 때문에 내부 온도가 약간 오르면 고기 중심부에 모여 있던 육즙이 골고루 퍼지면서 안정화므로 레스팅 후에 자르면 육즙 손실도 줄이고 고기의 식감도 전체적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어쨌거나, 어떻게 구워도 육즙은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고든 램지나 제이미 올리버가 올린 스테이크 굽는 영상을 봐도 육즙이 흘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이미 올리버는 오히려 레스팅 때 흘러나온 육즙을 모아 올리브유를 섞어 소스를 만들어 스테이크에 끼얹기도 한다.[5] 우리나라는 고기를 주로 석쇠나 불판 위에서 강한 불에 굽는데, 이렇게 하면 수분이 석쇠 밑으로 떨어지거나 강한 열 때문에 아예 표면으로 나오자마자 증발하기 때문에 육즙이 별로 안 나오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각주
- ↑ 실제로는 유아가 70% 수준이며, 성인이 되면 남자는 60%, 여자는 50% 정도다.
- ↑ 일본식 돈카츠를 만들 때 정말 일본에서처럼 발그레한 색이 남을 정도로 튀기면 덜익었다고 항의하는 손님들이 있다 보니 돈카츠를 한번 튀겨 칼로 자른 다음 다시 튀기기도 한다. 식감은 더 뻑뻑해진다. 이유를 설명하면서 고기가 발그레한 게 덜익은 게 아니라고 써붙여 놓은 가게들도 있다.
- ↑ "식탁위 대표적 '신화'…육즙을 가둘 수 있을까", 연합뉴스, 2020년 4월 18일.
- ↑ "스테이크 맛 살리는 ‘시어링’...육즙 보존과 관련 없어", 미트러버뉴스, 2020년 7월 23일.
- ↑ 고기 요리나 매시트 포테이토에 곁들이는 그레이비 소스가 원래 육즙으로 만드는 소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