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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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ot noir.

포도 품종의 하나. pinot는 소나무, noir는 검은색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즉 검은 소나무가 되는데, 포도송이의 모습이 솔방울과 비슷하다 해서 pinot라는 이름이 붙었고[1], 포도알의 색깔이 무척 짙은 남색이다 보니 noir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도알이 작고 껍질이 얇으며, 작은 알들이 빽빽하게 포도송이에 들어차 있는 모습이라 솔방울을 떠올리게 한 모양. 우리나라에서는 '피노 누아'라고 부르는데, 이건 영어식으로 읽은 것으로 프랑스어를 한글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피노 누아르'가 된다.[2]

서늘한 기후가 잘 맞는 품종이다. 무더운 지역에서는 생육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피노 누아르의 우아한 향미들이 미처 충분히 영글지 못한 채로 익어버린다. 이런 피노 누아르는 대체로 스파이시한 느낌이 나는 좀 이상한 맛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이른바 테루아테르를 심하게 타는 품종으로도 유명하다. 정말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향미의 레벨이 영 다른 와인을 만들어내는 놈이 바로 이 녀석이다.[3] 피노 누아르의 명성이 워낙 자자하다 보니 구대륙 신대륙을 막론하고 많은 지역에서 재배를 시도해 왔지만 특유의 우아한 향미를 내는 레드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은 피노 누아르 하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프랑스 부르고뉴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프랑스 부르고뉴 레드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이다. 부르고뉴 남쪽 끄트머리인 샬로네즈나 마콩 쪽으로 가면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지역인 보졸레 레드 와인의 주종인 가메 품종도 키우지만 그래도 부르고뉴 와인 하면 역시 피노 누아르. 일단 피노 누아르 100%가 아닌 레드 와인부르고뉴란 이름도 못 쓴다. [4] 단 한 가지 예외는 부르고뉴-파스-투-그랭. 가메와 피노 누아르를 혼합한다. 물론 부르고뉴 와인 중에는 대체로 가장 낮은 대접을 받는다. 다만 좋은 메이커의 파스-투-그랭 와인이라면 후진 메이커의 피노 누아르 100%보다 비싼 경우도 왕왕 있기는 하지만.

부르고뉴 와인 말고도 프랑스에서는 루아르, 알자스도 피노 누아르 와인이 인지도가 있다. 다만 캐릭터는 사뭇 달라서, 부르고뉴에 비해 여리여리한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 나온다. 둘 다 화이트 와인의 인지도가 훨씬 높아서 루아르소비뇽 블랑, 알자스리슬링, 게뷔르츠트라미네르 품종 와인이 훨씬 유명하다. 샴페인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샹파뉴 지방에서도 많이 재배하지만 피노 누아르만으로 만든 레드 와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밖에 프로방스를 비롯해서 남프랑스 쪽에도 피노 누아르 농사를 짓는 지역들이 있지만 대체로 뱅 드 페이 수준의 와인을 만드는 데 쓰이는 정도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이쪽에서도 뱅 드 페이 등급을 무색하게 하는 뛰어난 품질의 피노 누아르 와인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뉴질랜드에서도 많이 재배한다. 미국의 오리건 주와 뉴질랜드에서는 레드 와인의 대표 품종이다. 호주, 칠레 쪽에서도 재배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명성이 높은 신대륙 피노 누아르는 미국의 오리건이다. 이름난 부르고뉴 와인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평가가 좋은 와인들이 여럿 있다. 스파클링 와인에 블렌딩하는 주요 품종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목적으로 재배하는 지역도 여럿 있다. 껍질이 얇은 편이라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 저기 재배하는 곳은 은근히 많지만 가장 유명한 지역은 역시 부르고뉴와 오리건, 뉴질랜드 정도를 꼽을 수 있으며, 물론 가격대나 명성으로 본다면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르가 넘사벽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재배하는데 noir = black의 이탈리아어인 nero를 써서 피노 네로(pinot nero) 품종으로 표시되며, 찾아 보면 좋은 피노 네로 와인들이 있다. 피노 누아르는 부르고뉴 바깥에서도 재배하는 지역이 꽤 많은 반면, 가끔 피노 누아르와 비슷한 스타일로 비교되는 네비올로이탈리아 피에몬테 말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5]

보르도를 대표하는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가 강건하고 중후한 와인이라면 피노 누아르는 관능적인 이미지가 강렬하게 뿜어나온다. 'voluptuous(육감적인, 풍만한)'라는 단어는 피노 누아르 와인을 대변하는 단어 중 하나. 일단 베리 계통의 화사한 과일향에 장미꽃 향이 도드라진다. 좋은 와인이라면 처음에는 가죽향이 나서 이거 뭐래? 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리되고 베리향이 육감적인 몸매를 뽐낸다. 그때까지 못 참고 마셔버려서 문제지. 그런데 부르고뉴 바깥에서 나오는 피노 누아르를 마셔보면 어째 우아함은 덜하고 스파이시한 쪽이 더 부각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피노 누아르라면 부르고뉴 아니면 쳐다도 안 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저 레이블 빨로 여기고 미국 오리건이나 뉴질랜드 피노 누아르의 튼실한 향미를 더욱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구대륙과 신대륙을 막론하고 피노 누아르로 와인을 만들 때에는 거의 블렌딩을 하지 않는다. 블렌딩을 하는 와인으로 유명한 것은 의외로 스파클링 와인 쪽인데, 적포도지만 샴페인샤르도네, 피노 뫼니에르와 함께 들어간다. 샴페인이 화이트냐 로제냐를 결정하는 게 이 피노 누아르다. 짜서 과즙만 넣으면 화이트가 되고 으깨서 껍질째 넣으면 로제가 된다.

각주

  1. 꼭 피노 누아르만이 아니라도 포도송이가 솔방울을 닮아 있는 품종은 많다. 피노 뫼니에르, 피노 블랑과 같이 이름에 pinot가 들어가는 포도 품종들이 여럿 있다.
  2. 문학이나 영화의 장르 중 하나로 쓰이는 '느와르' 역시 프랑스어 noir에서 온 말인데, 일본식 표기법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느와르'로 굳어져 버렸다.
  3. 다만 와인의 품질은 양조자의 정성과 기술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므로 꼭 포도만의 차이로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전자 쪽의 비중이 더 높다고 보는 와인 전문가들도 많다.
  4.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샤르도네 단일 품종을 써야 하지만 알리고테 품종을 쓴 것은 부르고뉴 알리고테 AOC를 받을 수 있다.
  5. 가끔 호주나 미국에서 재배도 하고 와인도 만들긴 하는데 생산량도 너무 적고 존재감도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