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순위채권
말 그대로 순위가 뒤인 채권. 정확히는 빚진 회사나 개인이 망해서 자산을 매각 청산했을 때 돈 받을 순위가 뒤라는 뜻이다. 개인도 후순위채권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최대한 당겨 썼는데 돈이 더 필요할 경우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에서 후순위채권 형식의 추가대출을 받기도 한다. 하긴 어차피 대출이 이루어진 순서대로 우선권이 있으니 이건 자동으로 후순위가 되긴 한다. 물론 돈 받는 순서가 늦고 그만큼 떼일 위험도 커지므로 이자율은 왕창 뛴다. 또한 후순위채권은 선순위채권보다 만기가 긴 게 보통이다.
진짜 후순위채권은 발행 날짜 무시하고 그냥 후순위인 경우다. 회사가 채권을 발행할 때 변제우선권에 차등을 두어 여러 단계의 채권을 발행할 수 있다. 회사 청산 때 변제 순위가 높은 채권일수록 리스크가 낮으므로 이자율은 낮아지며 반대로 변제 순위가 뒤로 밀릴수록 리스크가 커지는 대신 이자율이 높다. 특히 자산유동화증권(MBS)을 발행할 때 채권의 변제 순위를 여러 단계(트렌치)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가지고 MBS를 발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부동산의 현재 가치가 10억 원 정도인데 조달해야 할 자금은 12억 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10억 원을 선순위채권으로 발행하고 2억 원을 후순위채권으로 발행한다. 즉, 후순위채권에 투자한 사람은 높은 이자 수익을 얻는 반면 회사가 채권을 갚을 돈이 없어서 부동산을 처분했을 때에는 선순위채권자가 먼저 가져가므로 손실 위험이 높아진다. 제발 부동산 값이 오르기만을 기도하자. 물론 후순위채권에서도 후순위채권에도 다시 변제 순위는 여러 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보통 만기 때 원금을 못 돌려받을 리스크가 적은 순위에 해당하는 채권을 선순위, 리스크가 큰 녀석들을 후순위로 본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후순위채권을 많이 발행하는데, 이는 자기자본비율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금융기관 관련 기사에서 국제결제은행(BIS)비율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텐데, 이는 위험가중자산에 대한 자기자본 비율을 뜻한다. 즉 자기자본이 많을수록 BIS비율이 높아지며, 은행감독규정에서 정한 최소 BIS 유지비율인 8%를 못 맞추면 각종 규제가 가해진다. 은행들은 될 수 있으면 BIS비율을 10% 이상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만기가 5년 이상인 후순위채권이나 후순위차입금은 BIS에서 보완자본으로 인정해 주므로, 후순위채권을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1]
후순위채권은 금리가 높은 대신 위험도 높으므로, 투자기관에서는 이러한 위험만 또 따로 떼어내서 거래를 하는데 이게 신용부도스와프(CDS)다. 즉 보험사와 같은 기관에서 부도가 났을 때 손실을 보상해 주기로 보증하고, 대신 채권자는 보증기관에 돈을 낸다. 즉 부도 위험에 대비한 보험을 드는 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도 한몫 단단히 한 게 이 후순위채권이다. 안 그래도 신용도가 낮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가지고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이 선순위와 후순위채권을 섞어서 파생상품을 만들면 신용도가 후순위채권의 신용도보다 조금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 파생상품을 묶어서 또 파생상품을 만들면 신용도가 좀 더 올라간다.[2]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선순위채권의 신용도와 비슷한 수준의 파생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줄기를 타고 내려가고 내려다가 보면 엄청난 규모의 후순위채권들이 깔려 있는데도 겉보기에는 우량한 파생상품인 것이다. 그러다가 주택 가격이 떨어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체가 급증하자 후순위채권부터 박살나면서 대규모 파생상품 손실로 이어지면서 파생상품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넘어 글로벌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후순위채권의 신용부도스와프를 해 준 AIA 같은 보험사들까지 대규모 부도 사태로 아작이 나 버렸다.
각주
- ↑ "초저금리 시대 후순위채 투자가 좋다", 주간경향 1436호, 2021년 7월 19일.
- ↑ 예를 들어 두 가지 파생상품을 묶어서 두 개가 동시에 부도가 날 때에만 원금손실이 발생하는 파생상품을 만든다면 손실 위험은 1/2로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