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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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gan.

호주를 중심으로 뉴질랜드에서도 쓰는 속어. 교육 수준이 낮은 저소득 노동자 계층으로 마초 성향과 보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딜가나 가난한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기득권층을 지지한다.[1]

어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사이에 서부 멜버른 또는 멜버른의 서부 외곽 지역 쪽에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이쪽에 보간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 그런데 사람들의 성향으로 보면 시드니보다는 멜버른이 좀 더 진보적이다. 오히려 멜버른 대도시 분위기에서 밀려난 분들이 더욱 보수 꼴통의 길로 간 것일지도.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외곽에 있는 보간 강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는 그냥 일부 지역에서나 쓰던 말이고, 호주 전역에 이 말이 널리 퍼진것은 90년대가 지나서야라고 하니, 역사는 짧은 편이다.[2] 원래는 건달, 불량배를 뜻하는 'larrikin(래리킨)'이라는 호주 영단어가 있었는데, 보간이 이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서 지금은 이쪽이 널리 쓰이고 있다.

미국에도 보간과 비슷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레드 넥'이라는 말이 있다.

보간 감별법?

'보간'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모나 생활 습관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단 마초 이미지가 강하며,

  • 말 : 목소리가 크고 떠들기를 좋아한다. 무식함이 철철 흘러 넘치는데 별로 부끄러운 것도 모른다.
  • 외모 : 콧수염을 기르고 뒷머리를 조금 길게 기른다. 대머리가 많다.
  • 옷 : 청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고, 작업용 부츠 혹은 어그 부츠를 좋아한다. 좀 지저분하게 하고 다닌다. 웃통 훌렁훌렁 벗는 것은 예사로 여긴다. 완전 마초 티 팍팍. 겨울에도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남자다움을 과시하려고 용쓰기도 한다.[3]
  • 식습관 : 고기를 좋아하고 채식주의자들을 싫어한다. 햄버거감자튀김 같이 열량 높은 정크 푸드도 좋아한다. 건강한 식습관에 큰 관심이 없는 편. 그 결과로 당연한 얘기지만 비만이 많다.[4]
  • 맥주 : 싸구려 맥주를 마신다. 빅토리아비터멜버른비터, XXXX 같은 것들.[5] 술을 즐기고 과음도 불사한다.
  • 차 : 소형 트럭을 좋아한다. 홀덴 콜로라도나 GM의 다코타 같은 것들. 운전도 난폭하게 하는 편. 술에 쩔어 사는지라 음주운전도 종종 하는 듯하다.
  • 사는 곳 : 주로 도시 외곽 지역에 산다.

하지만 위의 스테레오타입 중 일부에 해당된다고 해서 함부로 보간이라고 단정하지 말자. 백호주의니 뭐니 하면서 호주가 인종 차별의 나라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호주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외국인들에게 관대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아프리카인 차별하는 거 보면 호주 보고 뭐라 할 자격도 없다. 나이 들면 다 꼴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이든 사람들 중에도 호주의 다문화정책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젊은 층 가운데에도 '우리 일자리 외국인들이 다 뺏아가' 하는 식으로 외국인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는 이들도 종종 있다. 확실히 외모로 보나 정서로 보나 보간인 사람조차도 무슬림 난민은 싫어하지만 아시아인들에게는 별 반감이 없는 사람들도 많아서[6] 이들의 정서도 꽤나 복잡하다. 그저 외모나 맥주, 자동차 같은 걸로 사람 함부로 평가하는 거 아니다. 생활 습관이나 행동거지, 신념과 같은 요소들을 제대로 관찰해야 보간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보간 보고 보간이라고 그러면 싫어한다. 위의 설명을 보면 한 대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꼴통 보고 꼴통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나.

멸칭이 아닌 경우

21세기에 접어들면 이 말이 가진 경멸적인 의미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호주에 사는 앵글로색슨 계열로 호주인이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이 센 사람들을 아울러서 부를 때도 종종 쓰이고, 2002년에는 '전국 보간의 날(National Bogan Day)'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다. 2011년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교 언어학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30대 이하에서는 이 단어의 뜻을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30대 이상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했다 한다. 단, 이 얘기가 무식한 꼴통을 30대 이하가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단지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가 이 말을 받아들이는 의미가 좀 다를 뿐이다. 또한 전보다 희석됐다 뿐이지 경멸적인 뜻도 여전히 상당히 남아 있다. 그러니 호주 사람들에게 보간이라는 말은 극히 주의하자. 사실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던 단어가 그 뜻이 희석되고 점점 긍정적인 뜻으로 바뀌어 가는 일들은 어느 언어에서나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서쪽에는 '보간'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지명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이런 지명들이 여기서 얘기하는 보간의 어원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 쪽에서 나온 지명이 많다고.

각주

  1. 자세히 들여다 보면 꼭 희한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근근이 이어나가는 생활조차도 흔들리는 게 싫기 때문에 자신이 잘 살게 될 거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변화보다는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는 안정을 택하는 성향이 있다. 또한 예전에 변화를 선택했지만 자신의 삶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변화의 희생양이 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보수로 기운다.
  2. Olivana Lathouris, "The origins of the Aussie bogan and what the word 'bogan' means today", 9 News, 18 July 2020.
  3. 해안에서 가까운 호주 지역들은 겨울에도 우리나라만큼 춥지는 않고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도 별로 없어서 눈 구경이 거의 힘들다. 대신 한국과는 반대로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이 습도가 높다. 그래서 겨울에도 반바지나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남자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데 물어보면 춥기는 하다고 한다...
  4. 싸구려 옷을 파는 BIG W나 TARGET 같은 마트를 가 보면 무려 7XL도 있다.
  5. 이런 맥주들은 보간들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값싼 맥주 취급을 받는 것도 현실이다. 대체로 생활 수준이 낮은 보간들은 이런 맥주를 찾을 수밖에 없다.
  6. 다만 이들 중에서도 중국 사람들은 싫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세히 들어가면 좀 더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