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
Highball.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는 칵테일의 일종. 탄산수만 들어가는지라 칵테일이라 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 싶은데, 여기에 레몬즙이나 민트와 같은 것들을 넣어서 향을 주기도 한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길쭉한 글라스에 얼음을 채운 뒤 위스키를 넣고 물이나 탄산수로 잔을 채운다. 위스키에 비해 물의 비율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상당히 마일드해지며, 탄산수가 들어가면 탄산의 톡 쏘는 맛 때문에 이게 술인가 싶을 정도다. 한마디로 레이디 킬러.
어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길쭉한 글라스를 쓰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개척시대 미국에서 철도 선로가 주행 가능한 상태임을 알리는 뜻으로 공(ball)을 높게 올리는 신호를 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즉 역에서 한잔 하다가 공이 올라가면 후다닥 열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때 간단하고 빨리 훌쩍 마실 수 있도록 발전한 게 하이볼이라는 것. 또는 식당차가 딸린 증기기관차가 속도를 올릴 때 증기 압력을 보여주는 게이지의 공이 위로 올라가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널리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은 미국보다 오히려 일본으로, ハイボール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어 있다. 처음 미국에서 나왔을 때에는 단순히 물을 타는 것이었지만 일본에서 덕후국 답게 테크트리를 제대로 타면서 탄산수를 넣는 것으로 굳어졌다. 맥주 파는 곳이라면 하이볼도 판다고 보면 될 정도. 일본에서는 진즉부터 소주에 물을 타 마시는 미즈와리(水割り)가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하이볼은 위스키맛이 슬쩍 날 정도로 탄산수를 타는 비율이 더 많다. 산토리에서 권장하는 비율은 위스키 1에 탄산수 4의 비율이며, 먼저 잔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와 탄산수를 부은 다음 딱 한 번만 저으라고 권장한다. 마시기도 부담 없이 깔끔하고, 증류주라 숙취도 적은 편이라 일본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맛을 봐서는 맥주보다 약할 것 같지만 실제 알코올 도수는 대체로 6~7도 선이라서 보통 4~6도가 주류를 이루는 맥주보다 오히려 높다. 사실 맥주의 쓴맛은 상당 부분이 호프에서 오는 거라.
업소에서도 사실 생맥주보다는 하이볼이 더 좋은 점이 여러 가지 있다. 일단 생맥주는 기계에 잡균이 끼기 쉽기 때문에 청소 및 관리를 잘 해 줘야 한다. 또한 생맥주 케그는 일단 개봉을 하면 서서히 맛이 가므로 2~3일 안에 다 소비해야 하며 최상의 맛을 위해서는 그날 다 소비하는 게 가장 좋다. 반면 하이볼은 증류주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걱정이 적다. 알코올이 날아가지 않게 잘만 밀봉하면 된다. 또한 같은 용량의 잔을 쓴다고 해도 하이볼은 대부분이 얼음이기 때문에 실제 술의 용량이 작다. 즉 한 잔을 소비하는 속도가 빠르므로 업주는 좀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생맥주는 따르면서 거품을 걷어내거나 하는 과정을 통해 손실되는 양이 있지만 하이볼은 그런 게 거의 없다. 얼음을 얼려야 하고 다 마신 다음 남은 얼음을 처리하는 정도의 번거로움만 있는데 생맥주 관리의 번거로움에 비하면 사실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자카야를 위주로 슬금슬금 일본식 하이볼이 소개되고 있으나 아직은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소주나 위스키도 스트레이트로 때려마시는 민족이다 보니 하이볼은 술도 아니다. 대다수 업소에서는 위스키에 토닉워터를 섞은 것을 하이볼이라고 팔고 있는데, 마셔 보면 토닉워터 맛이 강해서 위스키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건 그냥 위스키 앤드 토닉이잖아." 하는 반응. 위스키의 향미가 은은하게 나지 않으면 하이볼로서는 꽝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하이볼을 만들 때 전용 탄산수 제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병에 들은 탄산수를 쓰는 곳도 많은데, 한국에서는 굳이 토닉워터를 이용한다. 소맥 같은 폭탄주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탄산수 하이볼로는 너무 밋밋하게 느껴져일지도. 한편 일본에서는 탄산수의 탄산 밀도를 강하게 하는, 이른바 초탄산(超炭酸)수를 사용하는 곳이 많은데, 청량감이 더 좋고 위스키의 향미도 별로 해치지 않는다.
가장 대중화된 것은 산토리의 카쿠빈 위스키를 넣은 하이볼. 2008년부터 밀기 시작했는데 이게 대박을 치면서 일본에 하이볼이 빠르게 퍼졌다. 물론 덕후 천국 일본 아니랄까봐 업소용으로 4리터짜리 페트병이 나올 정도다. 샴푸처럼 한 번 누르면 하이볼 한 잔 분량의 위스키가 나오는 펌프를 꽂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쿠빈 하이볼 하나 떴다고 만족할 일본이 아니다.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위스키로 하이볼이 만들어지고 고급화 테크트리를 타면서 아예 하이볼을 전문으로 하는 하이볼바도 있으며, 여기에 가면 카쿠빈은 물론 같은 산토리의 히비키, 야마자키, 하쿠슈, 치타를 비롯한 고급 위스키에 스카치 위스키, 싱글 몰트 위스키까지 다양하게 맛볼 수 있을 정도다. 그 대표격이 후쿠오카시 나카스에 있는 나카스1923. 하이볼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꼭 가볼 만한 곳이다. 이게 성공을 거두면서 주요 도시에 <○○○1923>이라는 이름의 하이볼 바가 생기고 있다. 심지어는 위스키의 종류에 따라서 탄산수의 탄산 정도를 조절해가면서 만든다고 자랑할 정도로 공을 들인다. 산토리가 버번 브랜드 짐빔을 인수한 이후로는 짐빔 하이볼도 열심히 미는 중.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닛카위스키 역시도 산토리 카쿠빈에 해당하는 닛카블랙 위스키를 열심히 밀고 있다. 닛카를 아사히맥주가 인수했기 때문에 주로 아사히맥주를 취급하는 가게를 통해서 열심히 밀면서 제법 시장을 먹고 있다. 이쪽은 맥주처럼 전용 기계를 사용한 닛카블랙 엑스트라 콜드 하이볼도 밀고 있다. 아사히 생맥주 엑스트라 콜드와 비슷한 개념.
보통 섞는 위스키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카쿠 하이볼, 히비키 하이볼과 같은 식으로 부른다. 넓게 보면 위스키로 볼 수 있는 일본식 소주를 이용한 하이볼인 츄하이(酎ハイ)도 널리 퍼져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위스키를 벗어나서 코냑 같은 브랜디를 사용하는 하이볼도 있다. 술에 타는 음료도 여러 가지로 파생되는데 탄산수 대신에 우롱차를 사용하는 우롱하이도 인기가 좋다. 일본에서는 우롱차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우롱하이도 꽤 팔리는 편. 고독한 미식가에서 술을 못 하는 주인공 고로가 우롱차를 주문하면 가게 주인이나 직원이 '우롱하이 아니고?' 하고 되묻는 일이 종종 있다. 그밖에 전문 하이볼 바에서는 진저(생강) 하이볼, 자몽 하이볼, 콜라 하이볼과 같은 다양한 하이볼을 구비해 놓고 있다.
일본에서는 캔에 넣은 하이볼 제품도 팔리고 있어서 편의점에 가면 맥주및 발포주만큼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하이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호주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싸구려 위스키와 콜라를 섞어 놓은 술을 캔에 넣어서 파는데 비슷한 지위라고 할 수 있을 듯.
집에서도 위스키와 탄산수만 있으면 간단히 만들 수 있다.
- 먼저 잔에 얼음을 꼭대기까지 채운다.
- 위스키를 먼저 붓고 탄산수를 붓는다. 산토리에서 권장하는 비율은 위스키 1 : 탄산수 4.
- 바 스푼, 또는 스틱이나 긴 젓가락으로 딱 한 바퀴만 저어준다.
- 취향에 따라, 또는 위스키 종류에 따라 레몬 슬라이드 한 조각이나 민트 잎을 넣어준다. 민트 잎을 쓸 때에는 손바닥에 놓고 한 번 때려서 향이 잘 나도록 한다.
그냥 마시기에는 좀 애매한 저렴한 위스키가 있다면 하이볼로 마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