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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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는 가루 분(粉)에 먹을 식(食). 여기서 '가루'는 밀가루를 뜻한다. 예전에는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원래 뜻에서 꽤 멀어졌다. 라면, 쫄면, 수제비, 만두, 어묵 같은 거야 밀가루가 들어가지만[1] 엄연히 밥으로 만드는 김밥도 분식 취급을 당한다. 떡볶이는? 밀가루로도 만들고 로도 만들지만 둘 다 분식 취급. 순대는 또 어떻게 봐야 하나? 간편하게 조리해서 간식 혹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것들 중 어느 정도 한국화된 것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변했다. '분식집'에서 김밥도 팔고 떡볶이, 순대도 팔다 보니, 그냥 분식집에서 파는 거라면 분식으로 부르게 된 셈이다.

반면 밀가루로 만들지만 이나 파스타 같은 건 분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식이라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양식중식도 아닌, 값싸고 어정쩡하고 한국화된 간식류 녀석들의 모음이 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의미의 분식은 '밀가루음식'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값싼 음식의 대명사처럼 취급 받지만 옛날에는 쌀보다 밀이 귀했기 때문에 밀가루도 귀했다. 가난한 시절 주린 배를 채우는 음식이었던 수제비도 옛날에는 양반집 잔칫상에 올라오는 음식이었고, 국수도 혼례 같은 잔칫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잔치국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메밀을 많이 길렀던 강원도 쪽에서는 이걸로 국수수제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음식을 해 먹었지만 그 지역 한정이었고 보통 밀보다는 식감이 투박하고 끈기도 적어서 한계가 있었다.

현대적인 밀가루가 나오기 시작한 건 외세의 압력으로 인천을 개항하고 나서부터다. 인천은 1883년 개항으로 중국 조계지가 자리 잡고,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밀가루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국수 요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계지로 건너온 중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중화요리짜장면이 태어났다. 인천은 짜장면의 원조이기도 하고 쫄면의 원조이기도 하며, 칼국수, 냉면[2]을 비롯한 갖가지 국수 요리들이 발전했다. 그러나 이 때도 밀가루는 아직 값싼 식재료는 아니었다.

밀가루가 진짜로 값싼 식재료가 된 건 한국전쟁 후 미국 원조로 밀가루가 왕창 풀리면서부터다. 전쟁이 끝나고 먹을 게 참으로 부족했던 시절, 주린 배를 채워주던 귀한 식량이 미국에서 무상 원조해 주던 밀가루였다. 이걸로 국수, 수제비 같은 것들을 만들어 먹었다. 지금이야 별미로 먹는 음식들이고 고급진 재료들도 많이 넣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멀건 국물에 밀가루 익혀 먹는 식이었다.

60년대 들어서는 정부에서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서 분식을 열심히 장려했다. 서양 사람들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이유는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어서라고 사람들에게 열심히 선전했고, 한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등장하면서 분식이 더욱 대중화되었다. 이제는 소비량이 줄어들다 보니 이 건강에 좋다고 열심히 떠드는 중.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앞을 중심으로 분식집이나 분식 포장마차가 생기면서 분식이라는 개념이 점점 범위가 넓어졌다. 지금은 밀가루쌀가루든 뭐든, 분식집에서 파는 것 중 한 가지만으로는 제대로 한상 차린 식사로 보긴 뭐한 것들을 다 뭉뚱그리는 말이 되었다.

각주

  1. 어묵밀가루가 주재료는 아니다. 그리고 요즘은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넣은 어묵도 나온다.
  2. 인천 쪽의 냉면은 '세숫대야 냉면'으로 대표되는, 값싸고 양 많은 냉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