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몰로게이션
Homologation.
모터스포츠에서 차량 혹은 부품의 동일성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것을 뜻한다. 여러 다양한 차량을 모델, 클래스, 그룹으로 묶으려면 기준이 필요한데 그 기준을 세우고 각각의 차량을 그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을 호몰로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는 딱 떨어지는 말이 없긴 한데, 보통은 공인, 또는 형식숭인 정도로 번역한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번역은 '형식정의'가 될 것이다. 호몰로게이션은 형식을 '승인'하는 게 아니라 이 자동차가 어떤 형식인지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필요한가
예를 들어, 현대 쏘나타만 나갈 수 있는 경기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누군가가 메르세데스벤츠 AMG C63을 가지고 와서 곧 죽어도 이건 쏘나타라고 우긴다. 이 차는 쏘나타인가 아닌가? 이건 쉽다. 누가 봐도 C63은 쏘나타가 아니고 만든 회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AMG가 이 사실을 알면 꼭지가 돌 일이지. 이제 또다른 미친놈이 쏘나타를 끌고 와서 경기에 참가하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해서 속을 들여다보니 엔진이 AMG C63 것이다. 알고 보니 트랜스미션과 서스펜션도 전부 AMG였고 껍데기만 쏘나타였다. 이건 쏘나타인가 아닌가? 그래도 다들 쏘나타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엔진만, 기어박스만 쏘나타가 아니라면?
더 골치아픈 건 쏘나타이긴 한데 변형을 한 경우다. 좌우 휠 사이, 곧 윤거를 늘렸다면? 휠베이스를 늘렸다면? 게다가 쏘나타라고 해도 1.8리터와 2.0리터가 있다. 둘 다 쏘나타니까 같은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런 문제를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한다. 두 대의 차량이 같은 모델, 클래스, 혹은 그룹에 속하려면 어떤 제원까지가 일치해야 하고 어떤 부분은 좀 달라도 되는가? 이런 기준을 정하고 기준에 따라 차량을 분류하는 것이 호몰로게이션이다.
호몰로게이션이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대량생산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특정한 목적에 맞게 소량 생산되는 것이 아닌, 일반 판매용으로 대량생산되는 차량만 출전할 수 있는 경기들이 있다. 그런데 대량생산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FIA의 기준은 연속 12개월 동안 적어도 2,500대의 '똑같은' 차량이 생산되어야 한다.[1] 그런데 '똑같은'의 기준은 또 뭔가. 예를 들어 같은 제네시스라고 해도 세단이 있고 쿠페가 있다. 같은 제네시스 쿠페라고 해도 2.0 터보가 있고 3.8 자연흡기가 있다. 이들은 같은가? 다른가? 이 기준을 잡는 게 호몰로게이션이다.
이렇게 호몰로게이션을 하면 이제 어떤 그룹이나 클래스에 넣을 것인지를 정할 수 있다. 어떤 경기가 단일한 차종만으로 진행되는 원메이크 경기라면 모르겠지만 많은 경기들은 여러 가지 차종들이 경쟁을 하고, 이들 사이의 경쟁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그런데 제원이나 성능 차이가 너무 나는 차량들을 한 경기에 몰아놓고 경쟁하라고 하면 결과는 보나마나가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성능 차이가 크지 않은 차종들끼리 그룹이나 클래스로 묶게 되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게 바로 호몰로게이션이다.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호몰로게이션을 운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F1은 5년 단위로 엔진을 호몰로게이션 한다. 어떤 제원의 엔진이 만들어지면 이것을 호몰로게이션하고 5년 동안 일부 변형 및 개발만 허용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무분별한 개발을 제한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도록 한다.
세계적으로는 FIA가 관리하지만 각 나라의 ASN이나 챔피언십이 자체 기준으로 이 제도를 운영하기도 한다. 또한 GT4나 TCR은 FIA 호몰로게이션을 응용해서 자체 인증 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2]
호몰로게이션 폼
여기서는 FIA의 호몰로게이션을 기준으로 한다. 호몰로게이션은 이를 받고자 하는 자동차의 제작사가 ASN을 경유해서 신청한다. 호몰로게이션 말고도 FIA에 뭔가 신청을 해야 할 때에는 바로는 안 되고 각국의 FIA 대리점이라 할 수 있는 ASN을 거쳐야 한다. FIA로서는 이렇게 ASN의 권위및 수수료를 챙겨주는 것이다.
이때 제조사는 호몰로게이션폼(homologation form)을 작성한다. 우리말로는 형식정의서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신청하는 차량 모델의 온갖 제원을 기입한다. 차량 각 부분의 치수, 엔진, 트랜스미션, 서스펜션을 비롯한 온갖 기계 장치의 자세한 제원, 롤케이지를 비롯한 안전 장치의 제원까지, 수백 가지가 넘는 항목들이 있다. 이러한 항목들은 제조사가 알아서 측정해서 기입하고 제출하면, ASN을 거쳐서 FIA가 빠진 항목이나 잘못된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국제스포츠규칙 부칙 J에 정의된 그룹의 정의에 따라서 차량 모델을 분류한다.[3]
혹시 제조사가 속임수를 써서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기입했다면? 제조사만 손해다. 차량검사를 할 때에는 형식정의서의 제원과 일치하는지를 검증하게 되는데. 진짜 차량과 다른 치수를 공인서에 써 놓으면 실제 차량과 맞지 않으니 규정 위반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신청이 들어오면 FIA에서 자동차 회사 또는 공장으로 실사를 나와서 공인서의 내용에 문제가 없는 측정 작업이나 각종 조사를 진행했다.
확장
호몰로게이션 폼에는 기본 모델의 내용을 적는다. 그런데 한 가지 모델이라도 여러 가지 변형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쏘나타라고 해도 1.8 리터 엔진을 얹은 모델이 있는가 하면 2.0 리터 엔진을 얹은 모델이 있을 수 있고, 하이브리드 엔진 모델이나 디젤엔진 모델이 있을 수 있고, 수동변속기가 있는가 하면 자동변속기가 있고... (물론 실제 쏘나타가 이렇게 다양한 모델로 분화되어 있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예로 든 것) 이런 차이가 있을 때마다 호몰로게이션 폼을 다 따로 따로 만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낭비다. 그래서 호몰로게이션 폼에는 확장이 존재한다. 아래와 같은 확장들은 기본 호몰로게이션 폼의 말미에 추가된다. 기본 폼보다 확장이 더 많아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많이 있다.
변형
변형(variant)이란 한 가지 기본 모델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변형 모델을 뜻한다. 변형은 기본 모델의 부품으로 바꿔서 원래의 기본 모델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변형은 다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공급변형(variantes de fournitures, VF) : 같은 부품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회사에서 공급함으로써 생기는 변형. 고객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 생산변형(variantes de production, VP) : 판매자의 요청에 따라서 공급되며 판매자가 재량을 가지는 변형.
- 옵션 변형(variantes options, VO) : 특정한 요구에 따라서 공급되는 변형. 보통 고객이 선택할 수 있다.
- "키트" (VK) : 특정한 요구에 따라서 공급되는 변형. 어떤 목적을 위한 부품들을 '키트' 형태로 일괄 공급하는 것으로, 키트 변형을 하려면 모든 부품을 일괄 적용하는 게 원칙이다. 즉, 어떤 건 쓰고 어떤 건 안 쓰고 해서는 안 된다.
정오표
정오표(erratum, ET)이란 말 그대로 기존 호몰로게이션폼의 정보에 잘못된 부분이 (숫자나 글자 오타 같은 것들) 있을 때 이를 바로 잡는 것이다.
진화
기본 모델에 영구적인 변화가 있을 경우 이를 진화(evolution, ET)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같은 쏘나타지만 신형 모델이 나왔을 경우. 진화가 이루어졌다면 이전 모델은 단종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