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級グルメ。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쓰이게 된 용어로,[1] 흔히 저예산으로 제작해서 내용으로 보나 촬영이나 편집 같은 기술로 보나 싼티 나는 영화를 B급 영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B급 구루메는 대체로 저렴한 재료로 값싸게, 그리고 빠르게 만드는 서민적인 음식을 뜻한다. 파인 다이닝의 정반대편에 있는 음식. 특히 1990년 초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로 소비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B급 구루메가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음식에 구루메[2], 즉 미식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그렇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열심히 발전해 나가면서 어느덧 미식의 반열에 올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역시 라멘. 일본인들에게는 값싸게 요기를 할 수 있는 B급 음식이었지만 온갖 개량과 발전, 경쟁을 거쳐서 이제는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미슐랭 가이드에게 별 하나를 받은 라멘 가게까지 등장했다. 라멘이든 뭐든 장인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요리가 B급 구루메 취급을 받는 게 속상할 수도 있겠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B급 영화의 감성으로 정상급 영화를 뽑아내는 감독이 있는 것처럼, B급 음식을 기반으로 뛰어난 요리를 만들어내는 장인도 있는 법이다.[3] B급 구루메 음식들끼리 모여 경연을 펼치는 B-1 그랑프리라는 행사도 있다.
B급 구루메로 분류할 수 있는 음식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저렴한 가격 : 당연한 이야기. 서민들도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뭐든 고급화 테크를 타면 비싸고, 스시처럼 비싼 음식이라고 여기는 것도 100엔 회전초밥처럼 싸게 갈 수도 있으므로 같은 음식이라도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서민들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가격대인 음식들을 주로 B급 구루메로 본다.
- 저렴한 재료 : 저렴한 재료는 당연히 저렴한 가격의 기본. 값싸고 배불리 먹으려면 뭐니뭐니해도 탄수화물과 기름이다. 밀가루, 식용유와 같은 값싼 재료들을 많이 쓰는 편이고 양배추처럼 값도 싸면서 양도 많이 넣을 수 있는 채소도 인기 있다. 고기나 해산물도 쓰지만 이런 것들도 가격이 싼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고기라면 가격이 싼 부위를 쓰거나, 냉동육을 쓰거나, 얇게 저며서 양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얼마 안 되며 해산물은 냉동 새우, 오징어 같은 것들이 많이 쓰인다. 물론 수입산 재료도 애용된다.
- 빠른 조리시간 :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면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조리 시간이 짧은 게 좋다. 즉석에서 만드는 것들은 주로 볶거나 튀기는 음식들이 주종을 이루며 어느 정도 미리 만들어 놓고 마무리만 간단히 하면 되는 음식들도 많다.
- 진한 소스 : 재료 자체의 맛이 아주 좋으면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저렴한 재료 위주로 가는 B급 음식들은 재료 자체의 맛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재료의 질이 낮으면 오히려 안좋은 냄새나 맛이 나기 때문에 소스가 중요하다. 음식에 따라서는 재료 맛보다는 소스 맛으로 먹는다고 할 정도. 맛이 진한 소스를 사용하며 듬뿍, 팍팍 뿌려댄다. 대표적인 예가 오사카식 오코노미야키로, 단짠 맛이 진한 오코노미소스도 모자라서 마요네즈까지 듬뿍 친다.
B급 구루메로 분류하는 음식들은 대체로 전후에 등장한 것들이 많다. 전쟁에서 깨진 후에 값싸게 배채울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수요를 채우기 위해 저렴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많아졌다. 또한 고유 음식보다는 퓨전 음식들이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B급 구루메 음식들
이런저런 이야기들
나고야가 B급 구루메의 성지로 종종 손꼽힌다. 나고야메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다른 지방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B급 음식들이 여러 가지 있다. 호불호가 꽤나 갈리며, 그래서 외지인들은 나고야 음식이라고 하면 영... 좋지 않게 보는 이들도 많다. 나고야식 장어덮밥인 히츠마부시 같은 비싼 음식들은 물론 예외.
오사카 역시도 B급 구루메로 빠지지 않는다. 먹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맛의 고장이라지만 오사카를 대표하는 음식들을 보면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 야키소바, 쿠시카츠, 카스우동과 같이 대다수가 저렴한 것들이다. 회전초밥도 오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