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
Ale.
맥주의 일종. 하면발효법으로 만드는 라거 맥주가 등장할 때까지는 맥주는 그냥 상면발효로 만드는 에일 계열이었다. 섭씨 5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는 라거와는 달리 상온 발효인 에일이 조건을 훨씬 덜 타는 것은 당연한 얘기. 발효 속도도 이쪽이 더 빠르다. 무게감이 세고 과일향과 호프향이 풍부하지만 그만큼 마시기에는 좀 부담스럽다는 단점도 있다. 또한 잡균이 끼기 쉽고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하는 것도 어렵다. 과거에는 품질이 들쭉날쭉한 게 문제가 되어 체코의 플젠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에일이 담긴 통을 땅에 쏟아버리면서 시위를 하기까지 했는데, 그러한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시 차원에서[1] 독일 바이에른 쪽의 라거 기술을 들여다가 만들기 시작한 게, 오늘날 체코는 물론 유럽을 대표하는 라거 스타일인 필스너의 시작이었다.
냉장기술이 발달하고 라거 맥주 만들기가 쉬워진 20세기 들어서는 가볍고 깔끔한 맛으로 시원하게 들이키기 좋은 라거가 득세하면서 에일의 입지는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라거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독일,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세계 맥주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만큼은 에일이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다. 영국 펍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역의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드는 수백 수천 가지 에일을 만날 수 있다. 이것 저것 마시다 보면 뭔가 그게 그거 같고 이름만 바꿔 붙인 것 같지만. 소규모 다품종으로 생산하는 크래프트 비어도 에일이 많은 편인데, 저온 하면발효 방식인 라거는 냉각 설비가 필요하고 발효 기간도 길기 때문에 대량생산에 적합한 반면 에일은 그 정도 시설이 필요하지는 않으므로 소규모 양조에 유리하다.
색깔로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는 게 보통이다. 창백한 색깔부터 어두운 색깔 순서대로 보면 페일 에일, 골든 에일, 앰버 에일, 브라운 에일, 다크 에일까지가 자주 볼 수 있는 에일의 종류다.
밀맥주는 거의가 에일 방식으로 만든다. 라거가 압도적 다수인 독일도 밀맥주는 에일 방식으로 만들도록 아예 규정되어 있다. 기네스로 유명한 스타우트도 역시 에일의 일종으로, 흑맥주 중에도 에일 계열이 많다.
영국의 에일
맥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에일 하면 바로 영국을 떠올릴 정도로, 영국은 최소 자국산 맥주 한정으로는 여전히 에일 맥주가 대세다.[2] 영국의 펍에서 파는 캐스크 에일은 탄산가스가 전혀 없다! 맥주라면 당연히 탄산이 주는 톡 쏘는 청량감이 트레이드 마크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처음 영국 펍에서 에일을 마셨을 때 가장 당혹스러워 하는 부분이다. 사실 병에 탄산가스를 주입하고 가둬놓는 기술이 발달한 게 맥주 전체의 역사와 비교하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탄산가스도 없고, 열처리도 안 한 에일을 캐스크 에일(cask ale)이라고 부른다. 이들 중에는 심지어 필터링도 안해서 효모 찌꺼기 때문에 뿌연 것도 있다.
탄산가스를 주입하는 생맥주는 케그에 충전되어 있거나 따로 탱크에 저장되어 있던 탄산가스의 압력으로 맥주를 뽑아올리므로 레버만 당기고 있으면 맥주가 계속 나오지만 탄산 없는 에일은 옛날 시골에 있던 물펌프처럼 긴 손잡이를 힘줘서 당겨야 그 힘으로 맥주가 콸콸콸 나온다. 파인트 잔 하나 채우려면 여러 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탄산 없는 김빠진 맥주가 당혹스럽지만 마셔보면 적응된다. 이쪽이 위에 부담이 없다고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싫으면 라거 마시자. 거의 모든 영국 펍에서 탄산 없는 에일과 함께 탄산 있는 라거도 판다. 보통 탄산 있는 것을 라거, 탄산 없는 것을 비터(bitter)라고 부른다.
한때는 영국도 케그에 들어가는 탄산 듬뿍 에일이 대형 맥주 회사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어서 캐스크 에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캠페인 포 리얼 에일(Campaign for Real Ale) 단체를 만들고 캐스크 에일 살리기 운동을 펼치면서 다시 캐스크 에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영국 펍에서 파는 에일은 대부분 캐스크 에일이다.
그러나 탄산가스가 없는 에일은 거의 영국 펍 한정이고 병맥주로 나오는 에일은 탄산이 들어간다. 에일이 강세인 호주 펍에서 파는 에일도 탄산이 들어간다. 한국이나 그밖에 나라도 마찬가지.
각국의 에일
영연방에 속하는 호주나 뉴질랜드도 대량생산 되는 맥주는 라거가 주종이지만 에일 맥주도 펍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고 병맥주도 수십 종이 있다. 이웃 뉴질랜드도 마찬가지.
독일도 에일 스타일의 상면발효 맥주가 있다. 밀맥주는 일단 에일이고, 뒤셀도르프 지역의 맥주인 알트비어(Altbier)도 상면발효를 한다. 발효는 서늘한 상온 수준에서 하지만 발효를 마무리하면 낮은 온도에서 숙성한다. 'Alt'라는 말은 'old'를 뜻하는데, 독일도 라거가 널리 퍼지기 전에는 에일 방식의 맥주가 주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즉 '옛날 맥주'라는 뜻. 쾰른 지역의 맥주인 쾰시(Kölsch) 역시 상온에서 상면발효를 하는 대신 발효가 끝나면 알트비어보다 더욱 차가운, 섭씨 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숙성한다.
일본의 맥주는 대량생산 되는 건 라거가 절대 다수인데, 지역 양조장에서 소규모로 생산되는 지비루(地ビール)는 에일이 많다. 이런 지비루 가운데 상당수가 맥주가 아닌 발포주로 분류되는 것도 기묘하다.
맛대가리 없는 잡곡 맥주의 대마왕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크래프트 비어 붐이 일면서 에일 맥주가 많이 생산되고 있고, 이제 다른 나라에까지도 세력 확장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크래프트 비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새뮤얼 애덤스와 우리나라 맥주 마니아들에게도 인기 높은 IPA인 인디카. 이들을 필두로 미국의 크래프트 비어들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고, 이들 중 대다수가 에일 계열이다. 그 위에 있는 캐나다에도 에일 맥주가 꽤 있으며, 한국에도 앨리캣을 비롯한 여러 가지 캐나다 에일이 들어와 있다. 인디아 페일 에일 계열로 강렬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이태원을 중심으로 인기가 상당했다.
우리나라의 에일
우리나라에서는 마이크로브루어리 중심으로 소규모로 에일이 생산되고 시중에는 수입 맥주를 통해서 에일이 소개되어 왔다. 나름 에일이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이트에서 퀸즈에일을, 오비맥주에서는 에일스톤을 각각 내놓았는데 반응은 별로... . 한국식 말오줌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낯선 맛이고, 에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맛 없다고 씹히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국에도 크래프트 비어 붐이 본격적으로 일고 편의점에서도 수입맥주처럼 국산 크래프트 비어를 4캔에 1만원 하는 할인행사도 하며, 크래프트 비어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들이 많이 늘어난 데다가 브롱스처럼 일반 생맥주와 가격 차이가 크지 않은 수제맥주를 파는 체인점까지 등장하다 보니 문턱도 크게 낮아져서 이러한 맥주의 주종을 이루는 에일을 즐기는 인구들이 많이 늘어났다. 굳이 크래프트 비어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맥주를 좋아하는 젊은 층이라면 IPA 정도는 알고 있다. 문제는 IPA가 에일이라는 걸 몰라서 그렇지.